퇴계선생 시(詩)에 대하여
공자 맹자를 비롯된 유학자의 문학관은 단순한 인간의 감성을 표현한 문예작품이 아니라 도리와 문학의 일치[道文一致]를 근본으로 삼는 경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유학자들은 시를 통하여 도리를 밝히는[以詩明道] 전통을 이으면서 시를 통해 인간의 의지와 사상 그리고 윤리를 밝히려 하였다. 그러므로 도리가 실려있지 않은 시는 적어도 유학자의 경우에는 시로서 그 품격이 떨어졌다.
퇴계선생의 경우에도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는 사상[天人合一 思想]』을 보여준 시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일본학자 高橋進은 「퇴계는 초월자인 신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생사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즉 각자 자기의 생사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자기의 운명은 자기의 마음과 성정(性情)에 좌우될 뿐이다. 이것이 퇴계학의 독특한 면이다」고 한바 있다.
이와같은 철학적 사상을 많은 저술에서 밝히셨지만 이를 근본으로 시를 지으시고 실천의 의지를 다짐하셨다는 것이다.
선생 시를 연구하는 중국학자 왕소(王甦)는 선생께서 시에 관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는 듯하여 지극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주로 도연명의 감정, 두보의 품격과 규칙, 소동파의 아름다운 말씨, 주자의 사상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사람의 감정이란 사랑하는 것[愛之者]이 좋아하는 것[好之者]만 못하고 좋아함이 즐겨하는 것[樂之者]만 같지 못하다. 도연명. 두보. 소동파에 대한 태도는 좋아하고 사랑할 뿐이지만 주자에 대하여는 사랑할 뿐 아니라 좋아하고 즐겨하기에 조금도 권태로움이 없이 평생 한결같으셨다」고 한다.
한시(漢詩)는 일반적으로 작품의 문맥이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작품외적 사실에 깊이 그리고 은미(隱微)하게 연계되어 있는 일이 많다, 퇴계선생의 시가 특히 그러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께서 스스로 「처음 읽으면 비록 냉담한 것 같지마는 오래 두고 읽어보면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고 하며, 문맥 밖의 문맥은 주로 현실의 인간관계와 도학의 논리가 된다고 한다.
퇴계선생의 시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意想]은 많으나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선계(仙界), 달빛, 매화가 있다. 이 들의 공통점은 “깨끗하고 고요함[淸淨] 또는 맑고 참됨[淸眞]이다” 선계는 깨끗한 공간, 달빛은 고요한 분위기, 매화는 맑은 빛이다. 이 들이 둘 또는 셋이서 서로 얽혀 나타나면서 깨끗하고 고요하고 참된 세계를 바라면서 찾고 즐기는 것이 선조의 도학시의 세계이다. 이것이 곧 주리론(主理論)의 시적(詩的) 대응이라고 한다.
퇴계선생께서 남기신 시가 증보퇴계전서(내집 5권, 별집 1권, 외집 1권, 속집 2권)에 2,013수가 수록되어 있다고 하고(왕소 중국담강대 교수), 또 1,200여제에 2,270수가 전한다. 고도 하고, 내용은 잃어버리고 제목만 전하는 것이 800여제나 된다. 고 하고 있다(이동환 고려대 교수). 수량으로 본다면 중국의 시성 두보의 1,405편보다 많다. 다만 두보는 장편이 많고, 퇴계선조는 절구가 많아 편폭은 두보에 비하여 적다 할 것이다. 사상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주자보다는 배 가까이 많다고 한다.
15세부터[石蟹 : 가제] 70세의 돌아가실 때[而得寓精舍四絶見投今和其三 : 11월에 유응현의 시에 화답한시 임] 까지 시를 지으셨으며, 시를 본격적으로 지으시기는 33세(계사, 1533년)부터인데 37세(정유, 1537년)부터 39세(기해, 1539년)까지 3년간은 한 수도 짓지 않으셨다. 이때는 모부인 박씨의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어 슬픔이 스미어 시를 지으실 수 없었을 것이다. 또 163수나 지어 일생 중 가장 많은 시를 지으신 해는 61세(신유, 1561년) 때에 이다. 이 해에는 말에서 떨어져 신병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시며 도산서당 앞에 절우사를 꾸미신 해로서 마음이 가장 안정되신 해였다고 한다.
매화시에 대하여
퇴계선생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매화시 91수를 모아 《梅花詩帖 : 매화시첩》이라는 독립된 시집(詩集)을 유묵으로 남기셨다(상계종택 소장 ; 오래동안 영인출판되었음) 매화시는 모두 75제 107수(시첩 62제 91수)로 단일 소재로는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매화는 세속의 티끌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과 더러운 풍속에 굴하지 않는 절개와 봄날 같은 희망을 상징하는 꽃으로 많은 문인들이 달과 함께 맑고 깨끗한 시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로 인식되어 왔다. 또 매화를 좋아하는 이유로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제일 먼저 꽃망울 틔워 봄이 왔음을 알리는 우주의 기별자로서 사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께서는 겨울을 이겼다. 라는 경직된 절의(節義)만으로 매화를 대하지는 아니하셨다. 우주를 유연하게 깊은 안목으로 절의를 해석하여 고상한 인격체의 표상으로 대하셨다.
특히 절우(節友 ; 梅 蘭 松 竹 菊) 중에도 유독 매화를 매우 사랑하시었다. 매화로서 적막함을 달래셨고, 매화를 찾는 것을 신선과 봄과 같이 여기시었으며, 돈독하게 좋아하는 정은 가까운 벗과 같이 친하시었고, 사모하는 마음이 일일이 여삼추 같았으며, 어느 때고 관심이 식은 적이 없고, 조급할 때나 위태로울 때에도 매화를 잊지 않으시었으며, 매화를 읊음은 심사를 의탁하시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매화분을 딴 곳으로 옮기라 하시고「매형에게 불결하면 내 마음이 미안해서 그렇다(於梅兄不潔 心自未安耳)」하셨으니 본인의 추한 모습으로 인하여 매화도 추해질 것을 걱정하시었고, 운명 직전에 주위사람들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시었으니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까지 매화를 잊지 못하시었다.
선생께서 42세(임인, 1542년)때부터[玉堂憶梅] 70세(경오, 1570) 봄까지[都下梅盆好事金而精付安道孫兒船載寄來喜題一絶云] 매화를 주제로 시를 지으셨으나 대부분이 중년 이후에 지으신 것으로 노년에 들어 도학이 무르익을수록 매화시를 많이 지으셨으니 매화시와 도학적 정신세계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할 것이다.
많은 매화시에서 매화를 실로 여러 면으로 묘사하셨다. 그러나 그 여러 면의 많은 부분을 아우르는 것은 크게 보아 『깨끗하고 맑음[淸淨] 또는 깨끗하고 참됨[淸眞]』이라고 한다.
선생께서 68세(1568년) 7월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상경하시어 69세(1569년) 정월28일에 도산의 매화를 그리워하시며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憶陶山梅 도산 매화를 생각하다
湖上山堂幾樹梅 호숫가 도산서당 몇 그루 매화꽃이
逢春延停主人來 봄철을 맞이하여 주인 오길 기다리네.
去年已負黃花節 지난 해 국화시절 그대를 버렸으나
那忍佳期又負回 아름다운 그 기약 어찌 또 버릴까
丙歲如逢海上仙 병인년이 되어서는 바다 신선 만난 듯
丁年迎我似登天 정묘년은 나를 맞아 하늘에 오르는 듯
何心久被京塵染 무슨 마음 오랫동안 풍진에 물들어
不向梅君續斷絃 매화와 끊긴 인연 다시 잇지 못하는고.
* 병인년(1566.명종21)1월26일에 왕명으로 상경 중 득병으로 3월15일에 귀향
* 정묘년(1567.선조원년)6월14일에 왕명으로 상경하여 8월10일에 낙향
라고 하셨고,
3월 2일에 낙향윤허의 언질을 받으시고 3월 3일에 玩賞하시던 盆梅와 이별의 아쉬움을
漢城寓舍盆梅贈答 서울 집에서 분매와 주고받다.
頓荷梅仙伴我凉 매선이 정겹게도 외로운 이 몸 벗해주니
客窓蕭灑夢魂香 객창은 쓸쓸해도 꿈속은 향기로 왔네.
東歸限未攜君去 그대와 함께 못 가는 귀향길이 한이 되나
京洛塵中好艶藏 서울의 먼지 속에서도 고운 자태 지녀주오.
盆梅答 매화가 답을 하다
聞說陶仙我輩凉 듣자하니 도선도 우리 마냥 외롭다니
待公歸去發天香 임께서 오시기를 기다려 좋은 향기 피우리니
願公相對相思處 바라오니 임이여 마주 앉아 즐길 때
玉雪淸眞共善藏 옥설과 같이 맑고 참됨을 함께 고이 간직해 주오.
* 東歸 : 竹嶺을 넘는 길, 西歸 ; 鳥嶺을 넘는 길
* 陶仙 : 도산에 있는 신선, 즉 도산에 있는 매화
라고, 주고받으시고 3월 5일에 서울을 떠나 3월 17일에 도산에 도착하시어 도산의 매화와
季春至陶山 山梅贈答 늦봄에 도산에 이르러 매화와 주고받다
寵榮聲利豈君宜 부귀와 명리는 어찌 그대와 어울리랴
白首趨塵隔歲思 풍진 좇은 지난 삶에 백발이 다 되었네
此日幸蒙天許退 지금은 다행히도 낙향 윤허 받았으니
況來當我發春時 하물며 오심이 내가 활짝 꽃 필 때였던가.
主答 주인이 답하다
非緣和鼎得君宜 和鼎이 탐이 나서 그대 사랑함 아니라
酷愛淸芬自詠思 맑은 향기 좋다보니 사모하여 절로 읊네
今我已能來赴約 나 이제 기약대로 그대 앞에 왔으니
不應嫌我負明時 꽃 핀 시절 놓칠망정 허물은 말아주오
* 和鼎 : 옛날에 매실을 쪄서 조미료로 사용하는 것
라고 반가움을 나누시고, 4월 2일에 서울에 남겨 둔 매분에 대한 그리움을
次韻奇明彦 追和盆梅詩 見寄 기명언이 화답해 온 분매시를 차운하여 보내다
任他饕虐雪兼風 그대를 모진 눈바람 속에 맡겨두고
窓裏淸孤不接鋒 나는 창가에서 淸孤히 탈 없이 지났다네.
歸臥故山思不歇 고향산천 돌아와도 그대 걱정 그치지 않으니
仙眞可惜在塵中 仙眞한 그 모습이 티끌 속에 있음이 애처롭네.
* 奇明彦 : 奇大升(1527~1572, 號 高峯)
라고 읊으시고, 70세(1570년) 3월 27일에 손자 안도와 함께 찾아온 서울의 분매를 맞이하여
都下梅盆好事金而精付安道孫兒船載寄來喜題一絶云
서울에 있는 분매를 호사자 김이정이 손자 안도에게 부탁하여 배에 싣고 보내오니
기뻐서 이를 시제로 삼아 한 절을 읊다.
脫却紅塵一萬重 먼지를 뒤로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來從物外伴癯翁 속세밖에 찾아와 여윈 늙은이와 짝을 하네.
不緣好事君思我 안달하는 그대가 이 몸 생각 없었다면
那見年年冰雪容 빙설같은 그 얼굴 해마다 어찌 볼까.
* 金而精 : 金就礪(1526~?, 號 潛齋)
* 安道 : 李安道(1541~1583, 號 蒙齋, 퇴계 맏손자)
라고 다시 만나는 기쁨으로 읊으신 것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1570.12.4.)에 본인의 불결한 모습을 매화분재에게 보이기를 싫어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하시고, 돌아가시기 직전(1570.12.8.아침)에 “매화분재에 물을 주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셨다,
소설가 최인호(소설 유림 6권239쪽)는 “생전에 그토록 상사하던 매분이었으므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 물을 주라는 퇴계의 유언은 이 세상에 모든 삼라만상이 너와 나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둘이 아닌 하나라는 상생의 철학을 의미하고 있는 심오한 최후의설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退溪文集讀會. 編譯. 매화시. 서울 교육과학사. 2004.
李東翰. 眞脈 第3號. <以詩明道의 退溪詩>. 서울 진성이씨서울화수회. 2003.
尹絲淳 譯註 退溪選集. <退溪의 生涯와 思想>. 서울 玄岩社. 1993
王甦 著, 李章佑 譯. 退溪詩學(改譯版). 대구 中文出版社. 1997
金光淳 譯. 註解 退溪先生年普. 대구 國際退溪學會大邱慶北支部. 1992
李東歡. 陶山書院. 李佑成 編<퇴계의 시작 개황과 그의 작품세계> 서울 한길사. 2001
李東歡. 退溪學報 第19輯. <退溪의 詩에 對하여> 서울 退溪學硏究院, 1978
鄭錫胎. 退溪學硏究 第5輯. <退溪의 梅花詩에 對하여>. 서울 檀國大 退溪學硏究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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